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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세계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앞둔...조선왕릉이야기(3)

(3)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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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수보도위원 2018-07-02


 

 

(3)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이야기

 

인류가 언제부터 무덤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역사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고인돌 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무덤의 규모와 발견된 부장품을 두고 구분하는 정도다.

 

능은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무덤을 말한다. ()나라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이라 했고, 한나라 때는 능()이라 했기 때문에 합쳐서 산릉(山陵)이라고도 부르고 지금도 왕릉에서 지내는 제를 산릉제향이라고 한다. 

 

 

▲ 강화도 부근리 점골 고인돌...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자락 해발 약 15m 지점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덮개돌 무게에 의해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28m, 너비 3.7m이다. © 문화재청

 

 

 

우리나라 고대왕국의 왕의 출현을 상징하는 큰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특히 한족(漢族)과 접촉이 잦았던 고구려에서 거대한 능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고조선이나 삼한에도 대규모의 무덤군은 있다. 조선의 왕릉 형태는 통일신라의 것을 계승했고 고려의 공민왕릉을 모델로 삼았다.

 

-선사부터 고조선 삼한까지의 무덤 모습은

 

신석기시대의 무덤은 울진의 집단무덤인 세골장(洗骨葬), 춘천 교동의 동굴무덤, 통영의 욕지도와 연대도의 움무덤 등이 대표적이다.

 

청동기시대는 고인돌(지석묘), 돌널무덤, 독무덤(옹관묘), 움무덤이 있고, 북방(탁자)·남방(바둑판)·개석(뚜껑)식 등으로 구분된다. 초기철시대는 널무덤, 덧널무덤, 움무덤, 무덤(옹관묘), 돌돌림무덤[위석묘(圍石墓)] 등이 나타났다.

 

 

▲ 마한의 묘제...영산강유역에서 발굴된 대형 옹관묘     © 국립나주박물관

 

 

 

고조선은 청동기부터 철기시대 두 시대의 무덤이 골고루 나타난다. 삼한시대에는 소형의 널무덤이 나타나고 기원후 2세기 중반부터 덧널무덤으로 발전했고, 중부지방에서 발견된 돌무지무덤[적석묘(積石墓)]과 움무덤과 독무덤(옹관묘)을 계속 만들었다.

 

-고대의 왕릉은 능, , 고분으로 나뉘어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을 능(), (), 고분(古墳)으로 나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무덤을 능, 왕의 것은 확실한데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경우 총, 왕의 무덤으로는 추정되지만 껴묻기(부장품)가 아주 적거나 역사적 추적이 불가능할 때 고분이라 부른다.

 

삼국시대의 능은 발굴과 기록 등을 통해 알아낸 고구려의 동명왕릉과 고국원왕릉. 신라의 진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통일신라 이후 성덕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백제의 무녕왕릉.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릉과 마지막 왕인 전구형왕릉이 대표적이다.

 

 

▲ 백제. 부여능산리고분군...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15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후기 고분 20기가 사비의 외곽성인 나성 밖에 자리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4호로 지정되었다.     © 문화재청

 

 

 

고구려의 능은 네모난 방형(方形)의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 봉토무덤[봉토분(封土墳)], 벽화무덤[벽화분(壁畵墳)]이 일반적이다.

 

신라는 둥근 원형(圓形)을 기본으로 하나 고대신라에서는 돌무지덧널무덤이었고, 통일신라는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고, 평지에서 언덕이나 산으로 옮긴다.

 

백제는 돌무지무덤, 널무덤[목관묘(木棺墓)],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 독무덤[옹관묘(甕棺墓)]등이 있으며,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이다.

 

가야의 초기는 널무덤,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을 후기에는 돌덧널무덤으로 나뉜다.

 

 

▲ 발해 정효공주 묘의 벽화...정효공주(貞孝公主)는 제3대 문왕의 넷째 딸로서,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무덤에서 남녀 각 1인의 인골(人骨)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공주와 남편의 관이 각각 올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로 무덤 벽을 쌓는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 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수향 용해촌 서쪽의 용두산지도 보기에 있다.     © 문화재청

 

 

 

발해는 고구려 묘제를 계승한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육정산고분군의 정효공주묘를 들 수 있다. 그밖에 널무덤(土壙墓), 벽돌무덤(塼築墓) 등도 있다. 고분구조상 특이한 것은 고분의 봉토 위에 건축물을 조성하기도 했다. 고구려 고분 위에서도 건축물을 세웠던 흔적이 있어 고구려의 매장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총은 왕릉급 무덤은 추정하지만 주인을 알 수 없어 출토된 유물이나 벽화의 모습에서 이름을 얻은 무용총, 각저총(씨름총), 장군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있다.

 

그 밖의 무덤은 발견된 장소에 따라 송산리고분군, 안악고분군, 진파리고분 등에 개별무덤에 번호를 매겨 안악3호분 등으로 부른다

 

 

▲ 고구려 각저총 씨름도 ... 중국 지린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인 각저(씨름)총에 그려진 벽화로, 연리수(連理樹) 아래에서 두 역사가 맞붙어 씨름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 왕릉까지 영향을 준 통일신라 왕릉

 

신라는 중국과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삼국통일 후에는 당나라를 다녀온 승려들에 의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흘러들어와 평지가 아닌 언덕(구릉)에 무덤을 세우기 시작한다. 일설에는 풍수지리설를 정책에 반영한 이가 도선국사라고 한다.

 

통일 전에는 돌무지무덤을 중심으로 무덤을 꾸몄으나 무덤방인 현실(玄室), 무덤입구에서 무덤까지의 널길(복도)인 연도(羨道) 등을 갖춘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에 12지신상도 새긴다. 무덤의 돌로 만든 울타리인 난간석(欄干石)도 두르고, 석사자·문인석·무인석 등을 세우는 제도를 정립한다.

 

삼국통일의 발판된 성덕여왕의 능에 12지신상을 조각한 호석을 두르고, 통일 군주인 제29대 태종무렬왕릉에 능비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제33대 성덕왕릉에 이르러 무덤둘레에 넓고 긴 돌인 장판석으로 쌓고, 12지신상·석사자·무인석·화표석·능비를 세워 안정권에 든다.

 

 

▲ 경주 흥덕왕릉.... 원형봉토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로 12지신상을 두른 병풍석(둘레돌)아래 판석(板石. 얇고 너른 돌)을 깔아 회랑(回廊. 복도)을 만들고 난간석을 돌렸다.     © 문화재청

 

 

35대 경덕왕에 이르러 왕릉이 산속으로 들어가 산릉의 형식을 갖춘다. 38대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에 이르러 당나라 능묘형식에서 신라형식으로 바뀌고, 42대 흥덕왕릉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흥덕왕릉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 일대에 있으며 사적 제30호이다. <삼국사지><삼국유사>에 흥덕왕과 왕비가 합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변에서 <흥덕(興德)>이라는 비석의 일부가 발견되어 능 이름이 확인됐으며 전체적인 배치와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원성왕릉의 형식을 이었다.

 

 

 

▲ 신라 원성왕릉 석물 ....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38대 국왕 원성왕의 능으로 괘릉이라고도 한다. 무인상은 서역인 모습으로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고 있는 자료이다. 석사자도 잘 보존 되어 이곳의 석물 10점 모두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었다. © 문화재청

 

 

 

이 능은 원형봉토분(봉분)으로 지름 20.8m, 높이 6m12지신상을 두른 병풍석(둘레돌)아래 판석(板石. 얇고 너른 돌)을 깔아 회랑(回廊. 복도)을 만들고 난간석을 돌렸다.

 

능역 네 모서리에 돌사자를 한 마리씩 세우고, 능침 앞에 서역인과 무석인 한 쌍씩, 화표석 1쌍을 배치했다. 능침 왼쪽에 능비를 받쳤던 귀부(龜趺. 거북이 모습 받침돌)가 있다. 이 양식이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계속>

 

기사입력 :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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