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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획] 유림의 독립운동 ‘파리장서운동’ 을 아시나요....선현 137위 추모제 열려

11월 9일 성균관유림회관, 100주년 앞두고 기념사업회 조직 본격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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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수기자 2017-11-12


[문화기획=경기인터넷뉴스] 191931일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선포한 기미독립선언에는 불교·기독교·천도교 33인에 의해 주창(主唱)되었다. 하지만 이 독립선언에 유림계가 민족대표로 빠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 이가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심산 선생은 전국에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320일부터 26일 동안 전국의 유림지도자 137명의 서명을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침략국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알린 유림의 최대 독립운동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장서운동 추모제가 지난 11월 9일 성균관 유림회관 3층 강당에서 거행됐다.     ©오병학

 

대한민국 유림에서는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알리고자 2015년부터 추모하고 제례를 봉행하기 시작했고, 지난 119일 오전 11시부터 성균관유림회관 3층 강당에서 세 번째 파리장서운동선현추모제(巴里長書運動先賢追慕祭)”가 열렸다.

 

이 추모제는 성균관유도회총본부(회장 예정수)가 주최했으며, 성균관유도회서울특별시본부(회장 김동)가 주관했으며, 성균관(관장 김영근), 성균관여성유도회중앙회, 성균관청년유도회중앙회(회장 임대식), 선비문화학회, 신시민운동연합 등과 종로구 관계자 등 100여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장서운동 추모제...삼헌관과 제집사     © 오병학

 

-유림의 파리장서운동이란

 

1919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 지도자들이 서명을 했지만 조선왕조 500년 동안 국교였던 유교의 지도자는 단 1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 파고다 공원 3·1 독립선언 현장에서 이를 지켜보던 경북 성주 출신의 심산 김창숙은 독립선언서에 유림이 빠졌다는 사실에 깊은 수치감을 느끼고 동지들을 규합해 영남의 곽종석 선생을 대표로 추대하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유림 137명이 연서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문의 글을 프랑스 파리 평화회의에 보낸 독립운동이 바로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이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장서운동 추모제 ....2천 674자에 달하는  파리장서     © 경기인터넷뉴스

 

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게 된 것이다. 이 장서는 심산 김창숙이 짚신으로 엮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임시정부에서는 다시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한문 원본과 같이 3천부씩이나 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5대 승전국의 하나였던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가로막았다. 이 사건으로 곽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유림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과 한국대표단(출처: 국가보훈처)     © 경기인터넷뉴스

 

-파리장서 추진일정은

 

파리장서가 완성되기까지는 19193월부터 4월까지 두 달 가까이 진행됐다. 날짜순으로 살펴본다.(년도는 1919. 진행자는 심산 김창숙 선생. 출전은 김창숙의 <심산유고>와 <벽옹일대기> )

 

2월 중순 경북 성주에 있던 김창숙은 서울의 벽서 성태영으로부터 상경하라는 편지를 받는다.

 

광무황제의 인산일을 기해 국내인사가 32일 모종의 사건(독립선언)을 그대로 거행할

작정이다. 시기가 이미 성숙했으니 자네(김창숙) 즉일 서울로 와서 시기를 놓치지 말고

얼른 서울로 오시게

 

2월 말 김창숙은 부랴부랴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심산은 당시 모친이 환우중이라 급히 상경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하자 성태영은 심산을 꾸짖는다.

 

자네 걸음이 어찌 그리 더딘가 31일에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참이고, 자네는 연서할 기회를 벌써 잃었으니 한스럽네

 

31일 김창숙·김정호·성태영 등은 탑골공원에서 펼친 독립선언문에 유림이 빠진 것을 알고 대성통곡을 했다.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하는 데에 오직 세 교파가 주장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했다. 세상에 유교를 꾸짖는 자는 쓸데없이 유사(儒士)는 더불어 일하기가 부족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뒤집어썼으니 무엇이 더 부끄럽겠는가

 

마음을 다스린 김창숙 일행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계획을 세운다.

 

▲ 심산 김창숙 선생     © 경기인터넷뉴스

 

32일 심산은 곽종석을 대신해 상경한 김황과 곽윤을 만나고, 이튿날 이중업 등 서울에 모인 유림들과 경기도 김포의 성태영 집에서 각 지역 담당을 선정한다. 김창숙(경북), 김정호(경남), 성태영(경기·충남), 이중업(경북·강원) 그리고 곽종석을 독립청원운동대표로 선정한다.

 

이후 김창숙은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돌며 지역의 유림들과 접촉을 하며 지역별 독립청원서 초안을 수집한다. 320일 성주 암포에서 장석영으로부터 파리장서 초안을 받았고, 다음날 거창 다진에서 곽종석과 만나 문안을 확정한다. 대성통곡을 한지 20일만의 쾌거다.

 

▲ 파리장서 사건 공판을 일리는 기사(동아일보)     © 경기인터넷뉴스

 

325일 서울에 도착한 심산은 서명자 명단을 추가로 확보하고 26일 김창숙·유진택·임경호 등은 서울 송원동 이득년의 집에 모여 중국 상해(상하이)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할 수 있는 소개장을 받는다.

 

328일 충청도 유림대표 임경호 일행과 회동 경상·충청 유림 137인의 서명을 받아 파리장서를 최종 완성한다.

 

329일 김창숙은 용산역을 출발해 중국 단동을 거쳐 봉천(심양. 선양)에 도착한다. 이때 심산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단행한다.

 

심산은 중국에서 일경의 의심을 떨치려고 머리를 자르고 중국옷과 모자를 마련해 착용했다. 봉천에서 파리장서 자금을 받고 천진, 남경을 거쳐 4월 초 상해에 도착한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모인 이동녕·이시형·신규식·조성환·조성구 등을 만나 파리장서 제출을 의논하였다. 김규식을 파리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윤현진이 영문으로 번역한 파리장서 영문본을 각국 영사관에 발송하고, 한문본은 중국 각 기관과 국내 향교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영문본과 한문본은 각 3,000장씩 찍어 배포했다.

 

심산은 상해에 남아 제1회 상해임시정부 경상북도 대표와 교통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지냈다.

 

192751일 일경에게 체포되어 일본 나카사키(長崎)를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대구경찰서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해 앉은뱅이가 될 정도였다.

 

해방 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 등을 역임한 유림계의 대부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고, 196284세의 일기를 마쳤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인은 누구

 

19193월부터 4월까지 파리정서에 참가한 유림대표 137인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를 주도한 심산 김창숙 선생은 명단에 없다. 지도자로서 대의를 위해 지방의 유림 지도자에 기회를 주는 선생의 배려로 여겨진다.

 

당시 대표는 곽종석 선생이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는 처형되었다.

 

▲ 파리장서운동 발상지의 기념비 현황     © 경기인터넷뉴스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고석광(高石鑛) 류필영(柳必永) 이만규(李晩煃)

장석영(張錫英) 노상직(盧相稷) 류호근(柳浩根) 안병찬(安炳瓚) 김동진(金東鎭)

권상문(權相文) 김건영(金建永) 김창우(金昌宇) 신직선(申稷善) 김상무(金商武)

김순영(金順永) 이종기(李鍾夔) 권상익(權相翊) 고제만(高濟萬) 서건수(徐健洙)

곽수빈(郭守斌) 류연박(柳淵博) 하겸진(河謙鎭) 최학길(崔鶴吉) 이경균(李璟均)

이석균(李鉐均) 조현규(趙顯珪) 하봉수(河鳳壽) 이수안(李壽安) 하재화(河載華)

하용제(河龍濟) 박규호(朴圭浩) 우하교(禹夏敎) 김재명(金在明) 변양석(卞穰錫)

고예진(高禮鎭) 이승래(李承來) 윤인하(尹寅夏) 김봉제(金鳳濟) 박종권(朴鍾權)

윤청수(尹哲洙) 김택진(金澤鎭) 권상두(權相斗) 정태진(丁泰鎭) 정재기(鄭在夔)

임한주(林翰周) 배종순(裵鍾淳) 류진옥(柳震玉) 허평(許坪) 박상윤(朴尙允)

김지정(金智貞) 이인광(李寅光) 이학규(李學奎) 안종달(安鍾達) 손상현(孫上鉉)

이이익(李以翊) 류준근(柳濬根) 송홍래(宋鴻來) 송준필(宋浚弼) 성대식(成大湜)

이기형(李基馨) 이덕순(李德厚) 송효진(安孝珍) 강신혁(姜信赫) 전양진(田穰鎭)

이정후(李定厚) 노도용(盧燾容) 김태린(金泰麟) 김정기(金定基) 송철수(宋喆洙)

문광(文鑛) 송호완(宋鎬完) 송호곤(宋鎬坤) 권명섭(權命燮) 이돈호(李墩浩)

박정선(朴正善) 황택성(黃宅性) 이상희(李相羲) 최중식(崔仲軾) 김한모(金瀁模)

권병섭(權昺燮) 권상원(權相元) 고순진(高舜鎭) 김택주(金澤往) 정규영(鄭奎榮)

송호기(宋鎬基) 이길성(李吉性) 송석수(宋晳秀) 박익희(朴翼熙) 송재락(宋在洛)

권상도(權相道) 김병식(金秉植) 이능학(李能學) 조현창(李鉉昌) 이수인(李洙仁)

朴埈(박준) 이봉희(李鳳熙) 박은용(朴殷容) 정근(鄭根) 백관형(白觀亨)

전석구(全錫九) 송규헌(宋柱憲) 전석윤(全錫允) 김영식(金榮植) 김석수(金陽洙)

김상징(金相震) 장영구(張永九) 이내수(李來修) 조재학(曺在學) 김영찬(金永贊)

등재호(鄧在浩) 김덕진(金德鎭) 손진창(孫晋昌) 손병규(孫秉奎) 김병식(金炳軾)

이태식(李泰植) 이만성(李萬成) 이계원(李啓源) 이계주(李季埈) 우성동(禹成東)

김학진(金學鎭) 우찬기(禹纘基) 이형회(李柄回) 윤양식(尹亮植) 김용호(金容鎬)

이복래(李福來) 곽걸(郭杰) 우삼하(禹三夏) 우경동(禹涇東) 박순호(朴純鎬)

우승기(禹升基) 조삭하(曺錫河) 김동수(金東壽) 박재근(朴在根) 이진춘(李鎭春)

이인규(李麟奎) 이기정(李基定) 이상 연명부 순

 

-2017 추모제례는 어떻게 지냈나

 

파리장서운동 137위 추모제는 전통 유교방식으로 진행됐다. 혼을 모시는 청신(請神)례는 제헌관이 목욕재계의 의미로 손을 씻는 관세(盥洗), 혼이 제례에 참여하도록 향과 잔을 올리는 강신(降神), 혼을 맞이하기 위해 절을 하는 참신(參神)례를 먼저 한다.

 

이어 혼들을 위로하는 오신(娛神)례는 혼에게 비단을 올리는 헌폐(獻弊), 술잔을 오리는 헌작(獻爵), 혼을 위로하는 글을 올리는 독축(讀祝)의 초헌례에 이어 헌폐와 헌작을 하는 아헌례와 종헌례를 마치면 종헌관이 올린 술잔에 술을 가득 올리는 첨작(添酌)례 이후에 추모제에 참가한 제위자가 잔을 올리는 헌주(獻酒)를 한다. 이번 추모제에는 137위 모두에게 폐백과 헌작을 했다.

 

혼을 보내는 송신(送神)례는 젓가락을 내리고 절을 올리는 예성(禮成), 축문과 지방을 태우는 분축(焚祝)으로 제례를 마치고 음복을 한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장서운동 선현추모제...137위에 일일이 잔을 올리는 재관     © 오병학

 

-누가 봉무했나

 

2017년 파리장서 선현추모제례에 소임을 맡은 봉행위원은 아래와 같다.

 

잔을 올리는 헌관은 초헌관 예정수(성균관유도회총본부장), 아헌관 조총연(성균관부회장), 종헌관 임대식(성균관청년유도중앙회장), 동분헌관 김용환(김양수 선생후손), 서분헌관 류재섭(류진옥 선생후손), 전사관 원재식(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고문), 축관 위창복(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금천구회장), 집례 육철희(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총무국장), 알자 김홍화(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부회장), 좌집사 최복현(선비문화학회 운영위원), 우집사 김건아(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강남지부회장), 서좌집사 맹강현(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대회협력국장), 서우집사 박광춘( 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부회장), 동좌집사 이천복(선비문화학회 운영위원), 동우집사 허복만(성균관유도회서울시본부 부회장), 서전작 이내경(성균관여성중앙회), 서봉작 배경숙(성균관여성중앙회), 동전작 황미숙(성균관여성중앙회), 동봉작 구영실(성균관여성중앙회), 찬인 강희원·김현규·김경희·장미경·장미화 등 24명이 소임을 다했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장서운동선현추모제...독축     © 오병학

 

-137의 선현의 뜻을 기린 말들은

 

합동제례 봉행에 앞서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예정수 회장은 “3·1만세운동은 우구나 알고 있지만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운동을 대해서는 일반인은 물론 유림계에서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우리 유림은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처할 때 마다 의병운동을 이끌었고, 일제강점기에도 국내외에서 목숨을 걸고 국권을 위해 분투했다.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의기투합을 한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고 의미를 전했다.

 

추모제 이후 성균관 김영근 관장은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이 중심이 된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장거이다. 오늘의 추모제는 아픈 역사를 회고하고 유림의 독립정신과 애국애민사상이 깃든 유교문화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행사를 준비한 관계자들에게 노고와 경의를 표한다.”고 추모와 격려를 했다.

 

▲ 유림의 독립운동 2017 파리리장서운동선현추모제 ...예정수 관장의 인시말     © 오병학

 

종로구 김영종 구청장은 일제치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유교계의 대규모 저항운동으로 전개한 사건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137위 선현의 추모제에 참가해 매우 뜻있는 날이다. 파리장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장함과 울분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137위의 넋을 달랬다.

 

김순영 선생의 후손 김중위 전)환경부장관은 을미의병으로부터 이어진 유림의 독립자강운동은 3·1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유림의 독립운동은 결국 파리장서운동으로 전개됐고, 심산 김창숙 선생은 파리회의에 이 장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서 1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극심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될 정도의 고초를 당했다.”고 소회했다.

 

성균관유도회 서울시본부 김동대 본부장은 “2019년이면 파리장서운동을 펼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기미독립운동은 벌써부터 많은 기획들이 오간다. 선비는 죽지 않는다. 우리 유림은 한말의병을 주도했으며, 독립의지를 강력히 드러낸 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한다. ‘파리장서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오늘 발족한다. 유림은 물론 많은 국민이 동참해 주길 바란다.”고 기념사업회 취지를 밝혔다.

 

*본고는 본지 보도위원이자 구지옛생활연구소 한철수 소장이 제공한 원고입니다. 무단전제를 금하고 인용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입력 : 201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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